이곳은 개발을 위한 베타 사이트 입니다.기여내역은 언제든 초기화될 수 있으며, 예기치 못한 오류가 발생할 수 있습니다.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카를 5세 (문단 편집) === 경제적 측면 === 그의 화려한 군공은 유럽 역사상 전무후무한 넓이를 자랑했던 그의 영토, 다시 말해 '''세금'''에서 온 것이었다. 카를 5세는 [[쉴레이만 1세]]를 제외한 다른 정적들 전원보다 유리한 경제적 입장을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막대한 유산에도 불구하고 그는 재정적인 측면에서 엄청난 손실을 낸 부실 군주였다. 왜냐면 생전에 그가 일으킨 수많은 전쟁은 그의 넓은 영토에서 나오는 세금으로도 힘에 부쳤으며, 신대륙에서 창출돼서 대량으로 유입되는 금은보화들도 제대로 된 제련법 따위나 당시의 사회 인프라로 인해 곧장 융통하기가 어려웠다.[* 실제로 이 당시 스페인은 쏟아져 들어오는 신대륙의 금은보화들을 제대로 가공하거나 화폐화할 능력이 없어, 누군가 값을 부르면 현물로 지불할 수밖에 없었다. 한 마디로 '''현찰 박치기'''. 실제로 이때 당시 기록에는 어떠한 상단이 물품값으로 막대한 황금을 받은 탓에 스페인 사람들이 "타국 놈들이 우리를 서인도 놈처럼 여겨!"라고 말할 정도. 당연하지만 이런 형태로 풀려나오는 엄청난 금은보화들을 국가가 마땅히 환원할 수 있는 수단이 없는 한 엄청난 인플레이션을 유발하기 마련이며, 실제로 그리 되었다. 이러한 금은을 관리할 수 있을 만한 제도 및 제련법이 발달하게 되는 것은 그의 아들인 펠리페 2세의 치세 당시의 일.] 카를 5세가 전비를 충당하기 위해 사용한 방법은 세금 착취와 식민지 착취 뿐만 아니었다. 그는 당시 독일에서 금융업에 힘쓰던 푸거 가문이나 벨져 가문 등에서 엄청난 양의 돈을 빌렸다. 물론 이러한 자금 융자는 그 자체로는 나쁜 일은 아니다. 향후 갚을 능력만 있었다면 오히려 그 능력과 신용, 나아가서는 그만큼 어마어마한 돈을 자신의 이름으로 빌릴 수 있다는 실적까지 내세울 수 있게 된다. 융자해주는 측 또한 황제에게 돈을 대어줬다는 뒷배경을 얻을 수 있으니까 말이다. 실제로 합스부르크 가문은 자금 융자를 잘 이용해서 가문의 세력을 확장하곤 했으며, 그의 고모 마르카레테는 어린 카를에게 가문의 전통적인 자금 융자 비결을 전수해주기도 했다. 그러나 문제는 카를 5세가 그의 상환 능력을 초과할 정도로 너무나도 많은 자금을 빌렸다는 것이었다. 이러다보니 그의 치세 하의 스페인 왕국은 엄청난 빚을 졌는데 그 규모가 무려 3,900만 두카트 가량이나 되었다. 나중에 이 빚은 스페인 재정에 엄청난 부담으로 되돌아왔으며, 이로부터 말미암아 그의 뒤를 이은 [[펠리페 2세]]의 스페인은 결국 몇 번이나 파산하고야 만다. 펠리페 2세의 첫 파산은 왕위를 물려받은지 불과 1년 후인 1557년이었으므로 사실상 카를 5세의 실정으로 인한 것이었다. 이후 [[이베리아 연합]]의 큰 짐이 되는 막대한 빚은 사실상 카를 5세로부터 비롯되었고 그것을 그의 아들 펠리페 2세가 오스만 제국과의 전쟁과 네덜란드 독립을 막는다고 더욱 키운 셈. 더 최악인 것은 카를 5세가 빚을 갚기 위해 또 빚을 지는 카드 [[돌려막기]] 기술을 시전했다는 점이다. 카를 5세는 푸거 가문에서 빌린 빚을 갚기 위해 스페인에서 '후로'라는 공채를 발행했는데, 그 이자가 무려 10%였다. 당연히 이 공채는 남녀노소 상관없이 스페인 사람이라면 누구나 구매할 정도로 엄청난 인기를 몰았고, 나중에 후로의 이자율을 7%로 낮췄는데도 불구하고 그 인기는 여전했다. 하지만 그 때문에 스페인 사람들은 후로에서 나오는 연금에 의존한 채 스페인 내의 권리를 외국인에게 야금야금 빼앗기고 만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